
차례
결혼상담소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번
캠핑카
펫로스
여행 도우미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올해 세 권째 읽은 듯하다. 이 책이 재미있는 이유는 책 제목에서 보다시피 나와 나이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55세 이상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이번 소설집에서 주목한 것은 각 작품마다 등장하는 음료수들이다. <결혼상담소>에서는 홍차 얼그레이가,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번>에서는 주인공이 좋아하는 특별한 물이 나온다. <캠핑카>에서는 커피 이야기가, <펫로스>에서는 중국의 보이차 이야기가 <여행 도우미>에서는 미카와치야키 찻잔에 사야마의 햇차 이야기가 나온다.
학교에 근무하던 시절 각종 차와 커피에 조예가 깊었던 샘이 계신다. 예쁜 찻집도 많이 알고 차, 커피에도 일가견이 있으시다. 여교사들이 학교 일 끝나고 바로 집이라는 또 다른 생활 현장에 가서 일을 하는 건 힘든 일이다. 그래서 중간 쉼이 있어야 한다. 한숨 돌릴 수 있는 찻집이 필요하다. 아늑한 공간에서 잠시 머물러 휴식을 취하고 집에 가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다. 문득 그때 같이 갔던 보라매역 주변의 이쁜 카페가 생각난다.
무라카미 류도 이 소설에서 유사한 이야기를 한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저물어가는 인생에 당도하여 쓸쓸하다. 새로운 삶의 패턴을 찾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등장인물들은 다들 새로 제자리를 만들려고 고민하고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삶과 전혀 다른 지위에 놓여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대부분 경제적 문제나 가족 특히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오는 문제들을 안고 있다. 불안하고 아슬아슬하게 느껴지며 내 문제인 양 암담하기도 하다.
이 책을 읽노라니 막연한 불안감과 자아 정체성이 주인공들의 삶을 통해 다시 한번 공감하고 동일시되기도 한다.
그런데 주인공들이 야무지고 똑똑한 사람이 아닌 일반인들, 혹은 간신이 버티고 살고 있는 사람들인데 더듬더듬하면서 제 길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 나도 마음이 놓이게 된다.
이 소설은 다섯 개의 중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 첫 작품 "결혼상담소"에서 내가 인상 깊게 읽은 내용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결혼상담소
주인공이 좋아하는 홍차를 둘러싼 문장을 정리해보았다.
나카고메 시즈코는 평소보다 두 시간쯤 일찍 일어나 느긋하게 홍차를 끓였다. 하루는 어김없이 홍차로 시작된다. 홍차를 즐기기 시작한 건 4년 전부터다.
저녁에 일이 끝나면 곧바로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그 찻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하루는 찻집 주인 노부인이 얼그레이를 권했는데, 깊은 향과 쓴맛이 조금 감도는 부드러운 맛에 피폐해진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이제 두 번 다시 선을 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신주쿠역 화장실에서 눈물이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오미야로 돌아가서 단골 홍차 전문점에 들어갔다. 헤렌드 찻잔에 얼그레이를 달라고 부탁했다.

찻잔에서 독특한 향이 풍겼다. 향을 내는 데 쓰이는 감귤과의 베르가모트 향이었다. 유자와 비슷한 떫은맛 사이로 달콤새콤한 향이 희미하게 배어 나왔다. 마치 향이 나타났다 숨었다 하는 것 같았다. 그런 섬세함이 좋았다. 향이 가미되어 있기 때문에 뜨겁게 마실 때는 너무 진하게 우러나지 않아야 한다. 이 가게의 얼그레이는 향과 맛이 늘 완벽하다. 향을 음미하다 보니 조금씩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머 뭐 좋은 일 있었나요?”
홍차 전문점 주인의 물음에 “아뇨, 앞으로 있을 거예요.”라고 나카고메 시즈코가 대답했다.
나카고메 시즈코는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일을 실행했다. 웨이터를 불러서 얼그레이가 있는지 물어본 다음 꿀과 함께 남자에게 가져다주라고 했던 것이다.
괴롭거나 슬퍼서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얼그레이에 꿀을 타서 마시면 늘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웨이터가 찻주전자와 찻잔을 가져가 ‘저 손님이 보내신 겁니다’라며 나카고메 시즈코를 손으로 가리키자 남자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이쪽을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남자는 꿀을 타고 향을 맡더니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이제 오늘 밤은 이걸로 된 거라고 생각하며 자리를 뜨려는 순간, 남자가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면서 일어나더니 옆에 놓아둔 꽃다발을 들고 다가왔다.
남자는 고개를 떨구고 우두커니 선 채, “왜 홍차를 보내주신 거죠?”라고 물었다. 그건 얼그레이였는데 마음이 어수선할 때 꿀을 타서 마시면 기분이 진정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마시는 방법을 오미야의 홍차 전문점 주인이 가르쳐줬다.
누구나 힘든 시기가 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할 때 먼저 마실 것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마음이 진정될 것이다. 그것은 의식 같은 것이며 그 누구에게도 의존할 필요가 없다. 텔레비전에서 자살 뉴스를 접할 때마다 얼마나 힘든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저 사람은 뭔가 좋아하는 음료를 천천히 마시면 마음이 진정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주 먼 곳에 있는 상대를 찾아가 중요한 무언가를 전한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가치 있는 그것 같아요. 성의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고 상대를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렇게 함으로써 진심을 다할 수 있잖아요?
진심을 다한다는 게, 말 그대로 다 써버린다는 의미와 상대를 위해 뭔가 노력한다는 의미가 있는데, 그 두 가지 다 당신의 연인에게도, 소피아 로렌에게도, 물론 당신에게도 필요했던 게 아닐까 싶네요.
우리는 다른 인생이 시작되면 다른 사람이 된다. 나카고메 시즈코는 그렇게 생각했다. 남편과 헤어지고 나서 자신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얼굴이나 이름이나 성격이 바뀌는 게 아니라 곤충의 허물이 벗어지듯 무언가를 벗어던지고 다른 것이 새겨진다. <해바라기>가 그토록 서글픈 까닭은 세월과 상황으로 인해 사람이 바뀐다는 사실을 노골적일 만큼 정확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혼자 살아가자.
돈이나 건강 등에 대한 불안감은 있다. 불안투성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건 후회하면서 사는 것이다. 고독은 아니다.
나의 느낌
최근 나를 포함한 주변을 관찰하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고독감에 휩싸이는지 외로움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느낀다. 또한 그간 아무런 문제없이 일생을 살아왔다 하더라도 어떤 계기, 어떤 나이에 도달하면 산사태 나듯이 무너져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아마도 노년이 길어지면서 더 그런 문제가 많이 발생하고 장수와 연관성도 있는 것 같다.
우리가 공황에 빠질 때 좋은 처방은 유대를 공고히 하고 서로 교류를 하는 것이다. 만약 고립화된 개인이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존중되고 있다는 느낌이 중요한 것 같다. 좋아하는 취미활동을 주체가 되어 할 때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무라카미 류는 계속해서 생수나 차 이야기를 곁들어 주인공의 일상을 그린다. 우리가 차를 마시는 행위는 신체적 생명 유지라는 관점과 더불어 차분한 생각과 여유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먹는 행위가 직접적 생존과 관련된다면 차 종류는 정신적 생존과 관련된 느낌이 든다. 맛을 음미하고 천천히 향과 온도를 느끼며 무위의 상태를 보내는 것, 이것이 우리의 정서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를 생각하게 된다.
덕분에 나는 여기 나오는 차 종류와 찻잔들을 실제로 검색해봤다. 단순히 차를 마시는 게 아니라 거기에 어울리는 찻잔까지 구비해 조그마한 호사를 누릴까 생각중이다.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최재천 강연 "AI시대의 앎과 삶" (1) | 2025.09.25 |
|---|---|
| 무라카미 류 <55세부터 헬로라이프>읽고 2탄 (3) | 2025.09.17 |
| 무라카미 류 <69 sixty nine> (6) | 2025.08.11 |
| 오쿠다 히데오 < 코로나와 잠수복 >에 나오는 음악들 (5) | 2025.07.14 |
| 오쿠다 히데오 <라디오 체조> (1) | 2025.07.05 |